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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pt. of Fire and Disaster Prevention Engineering

체계적인 과학이론과 공학기술을 습득하고
사회의 안녕과 복리증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전문인력양성

소방방재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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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雲鳥樓)와 CC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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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10-28 10:57:25
운조루CCTV.jpg
10월 25일, 전남 구례군의 운조루 소방시설 조사를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운조루는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冑, 1726~1797)가 정조 때인 1776년에 짓기 시작, 7년간의 공사로 완공된 대 저택이다. 1968년에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었다.

다락을 설치해 외부출입에 제약이 많았던 여인들에게 담 너머 바깥을 조망할 수 있게 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뒤주 속의 쌀을 퍼 갈 수 있게 했다. 다른 고택에서 볼 수 없는 공간 구조를 갖고 있는 조선 후기 양반 주택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

넉넉한 자가 부족한 자를 돕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여긴 유이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은 대를 이어 계속되었다. 동학란, 여순반란사건, 6.25 전쟁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집이 불에 타 없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케 한다.

5대손 유제양(柳濟陽, 1846~1922)이 쓴 일기에 1877년 어느 날 도둑이 사당 담을 뚫고 들어와 놋쇠도구 등을 훔쳐갔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좀도둑에 불과하다. 쌀을 가져다가 가까운 화개장터로 가 놋쇠도구와 바꾸면 될 것을 왜 그랬을까. 운조루 후손들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선대가 전해준 유품들을 처분하지 않고 고스란히 간직해 왔다. 이를 다른 고택 후손들은 부러워하고 있다.

20여 년 전, 10대 종손 유홍수씨는 물건을 훔치러 집에 쳐들어온 강도에게서 흉기로 머리를 맞았다. 귀중한 물품들을 대부분 도난당했다. 2년여의 병원생활을 거쳤지만 지금도 몸이 불편하다. 이후, 동생도 운조루로 거처를 옮겼고, 지금은 12개의 방범 감지기, 4개의 CCTV의 도움으로 두 형제가 운조루를 지키고 있다.

소방시설 위치를 안내해 준 올해 83세인 9대 종부 이길순씨는 "다 훔쳐가고 이제 남은 물건이 아무것도 없다"며 세상의 각박함을 개탄스러워 했다. 아들의 근황을 물었더니 "병원에 입원 중이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문화재 관리에 정부가 발 벗고 나서지 않는 한 운조루에서의 사건은 다른 곳에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 이준영(3학년) 사진 신덕재(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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